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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 병산서원

chegnow 2009. 8. 31. 17:00

조선 선조 때의 재상 유성룡()을 향사한 서원.

지정번호

사적 제260호

지정연도

1978년 3월 31일

소재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 

시대

조선시대

종류

서원

 병산서원 홈페이지   http://www.byeongsan.net

 

1978년 3월 31일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동()에 있다.

전신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풍산유씨의 사학()이었는데, 1572년(선조 5)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13년(광해군 5) 정경세()가 중심이 되어 지방 유림이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863년(철종 14)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사원으로 승격되었다.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이다.

제향공간으로 존덕사()·신문(전사청()이 있고, 강학공간으로 입교당()·동재()·서재(西)가 있으며, 부속건물로 장판각()·만대루()·복례문()·주사() 등이 있다. 유성룡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정말 오랫만에 병산서원을 찾아와봤다...

전에 버스를 타고 들어와 몇키로를 걸어 힘들게 찾았을때 병산서원은 굳게 문을 닫고 있었기에 실제로 들어가본건 이번이 처음이라 하겠다...

아직도 들어가는 길중 약 2키로는 비포장도로이다...

예전에 비해 지금은 주차장도 있고, 주변정리가 잘 되어있어 좋았다...

 

병산서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병산서원 풍경을 찍어봤다...

 

정면에서 바라본 병산서원...

 

제일 처음 만나는 복례문(復禮門)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병산서원의 솟을삼문은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좌우로는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복례’라는 이름은 논어 <克己復禮爲仁>에서 유래한다. 이는 공자의 가르침을 함축한 경구(警句)로서,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는 유학의 자기절제의 정신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원래는 지금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입교당 중건일기(1921)」에 의하면 서원의 측면인 만대루 동편에 있었던 것을 이건한 것이라 한다. 병산의 험한 형세를 피하고자 했던 풍수원리가 담겨있었다.

 

복례문에서 바라본 서원안이다... 3개의 현판을 일렬로 정렬 해보았다...

 

복례문을 들어가면 왼쪽으로 광영지(光影池)가 있다...

광영지는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물길을 끌어 들여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지금은 흙으로 메꾸어 놓아 그 형태만을 짐작할 수 있다. '천원지방'은 우리나라 전통 연못의 조성 원리로 조상들의 우주관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땅을 의미하는 네모진 연못 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두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심양성(修心養性)을 근본으로 하여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서원 속의 정원'이다.

 

그리고 정면에 보이는 만대루(晩對樓)

병산서원에서 가장 알려진 건물로서 건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팔작기와집에 홑처마로 된 이 웅장한 건물은 인공적인 서원건축과 자연사이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데 한국 서원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기둥사이로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은 마치 7폭 병풍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만대’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인 '취병의만대 백곡회심유(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에서 따온 말이다.
-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만 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히 즐기기 좋구나’. 병산서원을 대표하는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만대루 밑에서 바라본 입교당...

 

입교당 앞에 병산서원이란 현판이 보인다...

 

입교당(立敎堂)

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건물인 강당이다. 원래의 명칭은 숭교당(崇敎堂)이었고 명륜당이라고도 불렸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이며,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기와집으로 가구는 5량(樑)이다. 강학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의 명성재(明誠齋)와 서쪽의 경의재(敬義齋), 세 부분으로 나뉜다. 양쪽 방에는 온돌을 들이고 중앙의 강학당은 3칸의 대청으로 개방하였다. 툇마루가 마련된 명성재에는 서원의 원장(院長)이 기거했으며, 서쪽의 경의재는 이른바 교무실에 해당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동재(東齋) 서재(西齋)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하고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두 건물은 똑같이 크고 작은 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되었다. 강당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이다. 2칸 규모의 큰 방은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이었다. 좌고우저(左高右低)의 원리를 쫓아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하였다.

 

 

입교당 앞에서 바라본 마당 풍경...

넓은 만대루가 정말 인상적이고 그 중간중간 보이는 낙동강 줄기와 높이 솟아오른 산이 아름답다...

 

입교당 뒷편에 보이는 나무한그루... 보호수라고 적혀있다...

나무는 배롱나무라 한다...

 

신문(神門)

서원의 내삼문(內三門)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하였다. 정면 3칸의 솟을삼문으로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향사례에서 신문 앞의 마당은 중요한 장소가 된다. 집례를 맡은 임원들은 신문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일반 학생들은 앞마당에서 참관하여야 한다.

 

신문안에 서애 선생과 수암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祠堂)인 존덕사가 있으나 문이 잠겨있어 존덕사는 보질 못했다...  

 

그리고, 장판각(藏板閣)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冊版)과 유물을 보관하던 곳으로, 입교당 후면 왼쪽으로 비켜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도리가 없는 구조이며, 습기를 피하기 위해 정면에 모두 판문(板門)을 달았다.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서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하였다. 서원의 명문도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 가운데 하나는 바로 판본의 소장량이다. 따라서 책을 발간하는 목판은 서원의 소중한 재산이었다.

 

또 하나의 건물...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는 곳으로 사당과 한 울타리 안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병산서원의 경우에는 전사청과 사당이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아래쪽에 있는 주소(廚所) 건물과 중심축을 맞춤으로써 전사청으로 올라오는 제수를 마련하는 주소의 작업을 충실히 지휘 감독하기 위함이다. 존덕사의 오른편으로 자리하고 있다.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만대루를 찍어보았다...

 

그리고, 언제적건지 알수는 없지만 화장실이다...

병산서원 안내문에 없는걸로 보아 최근에 지어진듯하다...

 

그리고, 병산서원 앞에는 기념식수가 하나 심어져있다...

부시대통령 내외가 다녀간 기념으로 심었다고 한다...

 

오랫만에 다녀온 병산서원...

예전에 찾아왔을때의 아늑함은 조금 사라졌지만 최근 새로이 단장한 모습이 이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