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진흥왕 14년(553) 의신스님에 의해 창건된 이후, 776년 진표 및 영심스님 대의 중창을 거쳐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8차례의 중수를 거듭한 법주사...
조선조 중기에 이르러서는 60여동의 건물과 7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로써의 위용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절의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고, 인조2년(1624)경에 이르러 벽암스님에 의해 또다시 법주사는 중창을 거듭하였고,
1851년에는 국가적 규모의 중수작업이 진행, 그 뒤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법주사는 신라시대에 처음 법등을 밝혀 기나긴 세월의 발자취를 절 안팎의 수많은 유물과 유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오늘날 이 땅에 미륵 신앙의 요람이라고 일컬어진다...
비오는 일요일...
잠시나마 머리를 식히러 길을 나섰다...
비가 안오면 속리산을 등산할 계획이었지만 적당히 비가 내려준다...
그래서 법주사를 가기로 한다...
법주사 입구에 있는 정이품송 소나무를 지나니 속리산 국립공원의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비 4,000원 (약간, 비싸다) 을 지불하고 주차를 한 뒤, 약한 빗줄기가 떨어지는 속리산 안에 자리잡은 법주사로 들어간다...
매표소에서 대인1인 기준 4,000원의 관람권을 끊어 비가 와서 사람의 발길이 드문 한적한 길을 따라 들어간다...
어느새 법주사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을 지나 어느정도 걸으니 안내판이 나오고...
수정교를 지나 법주사로 향한다...
수정교를 지나니 금강문이 보인다...
금강문을 지나니 두그루의 나무가 보이고 천왕문이 보인다...
천왕문이다...
천왕문을 지나니 보이는 오래되어 보이고 웅장한 사각모양의 팔상전이 나온다...
국보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는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팔상전의 오른쪽 옆으로는 범종각이 위치해 있다...
범종각 앞 쪽에서 바라본 청동미륵불/용화전 쪽 풍경이다...
지은지 얼마 되어보이지 않는 듯한 약사전...
약사전 앞쪽에서 본 청동미륵불과 팔상전...
법주사에 있는 국보중 하나인 국보 제5호로 지정되어 있는 법주사 쌍사자석등이다...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긴다.
사자는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쌍사자 석등을 지나니 멀리 보리수 두그루 사이에 사천왕석등과 대웅보전이 보인다...
대웅보전 앞에 위치한 보물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는 법주사석등이다...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을 올리고 있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아래받침돌은 면마다 안상을 얕게 새기고, 그 윗면은 가운데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윗받침돌과 대칭되게 연꽃을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대체로 각 부분의 양식이 정제되어 있고 조각수법이 우수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작시기는 신라 불교미술이 꽃피워진 8세기 중기 이후로 짐작된다.
보리수 나무에 핀 보리수 꽃...
대웅보전...
보물 제915호로 지정된 법주사 대웅보전...
대웅전은 앞면 7칸·옆면 4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내부에 모신 삼존불은 벽암이 다시 지을 때 조성한 것으로
가운데에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있다.
이 건물은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불전(佛典) 중 하나라고 한다...
대웅보전 좌측에 위치한 삼성각...
여기도 지은지 얼마 안되어보이는 명부전...
괴불대...
보물 제 1417호에 지정되어 있는 법주사 희견보살상...
희견보살은 성불의 큰 서원을 가지고 몸과 뼈를 태우면서까지 아미타불 앞에 공양하는 보살로서 사람에게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강한 의지를 배양하라는 뜻으로 저성한 것이라 한다...
이 보살상은 모루돌 위에 다기 모양의 그릇을 머리에 이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모루돌과 보살 그리고 그릇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얼굴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잘록하고 유연한 허리와 대조적으로 그릇받침을 받쳐든 양팔은 힘겨운 듯한 모습을
꽤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옷은 속옷 위에 가사를 걸쳤고, 띠 매듭과 옷자락이 무릎 위에서 투박하게 처리되었다.
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예술적 가치가 있는 희귀한 문화재이다...
법주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법주사 금동미륵대불...
금동미륵대불은 용화정토에 이르러 깨달음의 법을 설하시는 미래의 미륵부처님의 현존을 의미하는 것으로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약 8m에 이르는 기단 위에 높이 약33m의 국내에서 최대의 규모이다.
금동미륵대불은 용화정토에 이르러 깨달음의 법을 설하시는 미래의 미륵부처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동양 최대의 미륵불 입상으로 신라 36대 헤공왕 때 진표율사가 청동으로 주조하여 1000여 년간 내려왔으나 대원군에 의하여 「당백전」의 재료로 쓰기 위하여 훼철되고
그 뒤 1939년 조각가 김복진에 의해 만들어진 시면트 불상이 약 50여 년간 있어오다가 1987년 해체되고 1990년 청동미륵대불에 이르렀으며
현재의 금동미륵대불은 총 12억원을 들여 지난 2000년부터 개금불사 공사를 시작 17개월만인 2002. 6. 5일 완성되었다.
금동미륵대불은 총 80㎏의 순금이 소요됐으며. 겉부분(연면적 900㎡)에 3미크론(0.003㎜)두께의 금막이 입혀져 있고
섭씨 80℃∼-30℃에서 견딜 수 있는 건식 전기도금공법으로 광택을 유지할 수 있도록 특수 도금돼 있다.
금동미륵대불 기단부 안에는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의 모습을 형상화시킨 용화전이 있으며 용화전 벽면에는 13개의 미륵십선도가 부조되어 있다.
당간지주...
법주사 금강문을 들어서면 천왕문 못미처 좌측에 쇠로 만들어진 높다란 당간과 그 당간을 지탱하고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있다.
원래의 당간은 없어지고 지주만 남아있는데, 법주사의 당간은 고려 초인 1006년(목종 7)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 높이는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인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명령으로 국가에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기 위해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징발당했다.
이 와중에 당시 용화전의 미륵장륙상과 철당간은 녹여졌다고 한다.
현재 당간은 1910년 무렵 22m 높이로 다시 만들었으며 1972년에 보수하였다고 한다...
법주사의 무쇠로 만든 솥인 보물 제1413호의 법주사 철확...
감로수...
법주사의 3개의 국보 중 마지막 보물이다...
국보 제64호로 지정 되어있는 법주사 석연지...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물을 담아두며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석련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두었다.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70호 법주사석조는 법주사의 3천 승려들의 식수를 담아두던 돌그릇이라 한다...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며, 규모는 높이 94Cm, 길이 446Cm, 폭 240Cm, 두께 21Cm로 꽤 큰편이다...
법주사 능인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로 지정되어 있다...
능인전(能仁殿)은 법주사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앞에 조성된 건물로서 조선 인조 2년(1624)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법주사 중건시 벽암대사(碧巖大師)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하며,
건물 내에는 석가모니불과 함께 연대 미상의 16나한(羅漢)이 모셔져 있다.
조선후기 호영(呼映)스님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법주사전경도」에는 사리각(舍利閣)이라 표기되어 있어 이 전각이 원래 사리탑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이곳이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다면 통도사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불상이 조성되지 않아도 되며,
또한 이곳이 16나한을 모신 나한전(羅漢殿)이라면 그곳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羅佛)이 아닌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하는 16나한의 상이 모셔져 있어
현재로서는 건물 당초의 성격을 추정할 수 없다.
'능인(能仁)’이라 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별칭 중 하나로 ‘능히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하며,
능히 사바세계(온갖 괴로움을 참아 견뎌야 한다는 뜻에서 감인(堪忍)세계라 말하기도 한다)의 온갖 괴로움을 참아낼 뿐 아니라 그 괴로움 속의 중생들을 견뎌낼 분이라는 뜻에서
능인(能忍)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이렇듯이 교화력을 갖춘 분, 곧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곳 건물 안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에 능인전(能仁殿)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건물로 이익공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규모는 29.32㎡이다. 건물의 뒤편에는 법주사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이 있으며
건물의 전면 담장 밖에는 법주사 석조(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가 옮겨져 있다.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건물의 기단석 및 기둥 등이 옛 형태대로 잘 유지되고 있으며,
팔상전(국보 제55호),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사천왕문(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등과 함께 법주사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건물로 보존가치가 높다.
고려 공민왕이 법주사에 행차했을 때, 통도사에 있는 석가모니의 사리 가운데 일부를 이 곳에 옮겨오도록 하여 세워놓은 사리탑이다.
8각을 기본형태로 하여, 상 ·중 ·하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기단에서 아래받침돌은 윗면에 비스듬히 경사를 주었고, 가운데받침돌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윗받침돌은 솟은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다.
둥근 탑신의 몸돌은 아무런 장식이 없고, 지붕돌은 윗면에 흐르던 급한 경사가 끝부분에 이르러 완만해 졌다.
머리장식은 큼직한 원받침을 두어 그 위에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놓았다.
전체적으로 아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 부도는 고려 공민왕 11년(1362)에 만든 것으로 전한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제216호로 지정되어 있는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법주사 경내에 있는 마애여래의상은 높이가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옆 바위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이다.
불상의 머리는 바위에 새긴 것들에서는 보기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하게 새겼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에는 크고 긴 코와 둥근 눈썹, 뚜렷한 눈두덩과 함께 두꺼운 입술이 잘 표현되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여기에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왔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이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반듯하면서 넓은데 비해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면을 보여준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친 형태로 가슴에서 다리 사이로 흘러내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어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엄지와 맞대었다. 왼손은 앞에서 수평으로 들어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이 불상은 화사한 연꽃 위에 걸터 앉고 큼직한 연꽃잎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어,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렇게 법주사를 한바퀴 돌고 나왔다...
비가와서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하고 평일같은 여유있는 여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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